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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오해와 진실 입니다.

유용한 정보|2020. 9. 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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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e-Jeanne-Marie-Antoinette 마리 앙투아네트 1755~1793 :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입니다. 

작은 요정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웠으나 37살의 어린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왕비입니다. 

생전에 부패와 사치였으나 사후에는 여러 영화나 연극 등에서 오해를 풀고 있습니다. 

오늘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이 정말 진실일까 아니면 오해 일 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 뮤지컬, 영화 연극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소재입니다. 

그녀의 이름을 딴 베이커리 등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엔 아마도 명성황후와 조금은 닮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정략결혼 :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빈에서 출생합니다. 

1770년 14살 때 정략결혼으로 1774년 프랑스 절대군주 루이 16세에 왕비가 됩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한일관계처럼 앙숙인데 왕실의 혼사로 동맹을 맺는 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혼인 후 사교파티와 모임 등에서 두드러진 외모로 작은 요정으로 불리게 됩니다. 

검소한 생활을 하는 루이 16세와는 대조를 이루었으며 사치 부인으로 빈축을 사기도 합니다.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그녀의 명성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프랑스 국경 통과 시 옷을 벗다 :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국경을 넘을 때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진실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했으며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입고 간 옷을 모두 벗고 프랑스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는 있지만 갈아입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게 무슨 역사에 남을 만한 이야기 인가하고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그녀는 사치의 상징? : 마리 앙투아네트가 검소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치가 심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결혼했을 당시에 프랑스 왕가의 국고는 거의 탕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와 루이 16세는 왕실 예산 중 10% 정도를 사용했고 이전과 비교해보면 평균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왕궁에서 시골사람들처럼 꾸미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일화를 하나 보면 루이 16세의 화살에 농민이 맞은 사건이 있는데 그녀가 쓰러진 농민을 직접 치료해 줄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고 빈민 구제와 농경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혁명정부가 그들의 정당성을 위해 명분 찾기를 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목걸이 사건 스캔들 : 이는 오해로 그녀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매했다고 거짓으로 조작한 뒤 목걸이를 가로챈 사기극입니다. 

그녀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꾸며낸 고의적인 스캔들로 이 사건의 주범은 다이아몬드를 탐낸 라모트 백작부인이 매춘부를 매수해 그녀를 오해하게 만든 겁니다. 

이후 사실이 밝혀지면서 라모트 백작부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었으나 소문은 이미 돌 때로 돈 상태입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소문이 번지면 오해를 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빵 사건 : 이 또한 거짓이었지만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빵집에 어원이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긴 말 중 가장 유명한 말이 거리의 거지 아이들을 보고 불쌍한 아이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300년간 이어온 적국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한 혁명정부의 의도적인 소문입니다. 

이 말은 장 자크 루소의 저서 참회록에서 따온 거라고 합니다. 

 

결혼생활, 자녀 : 모든 왕들이 그러했듯이 후궁을 두는 건 관례인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랜 결혼생활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그녀는 부도덕의 아이콘이 됩니다. 

자녀를 두지 못하는 비난의 화살이 모두 그녀에게 갑니다. 

앙숙 관계인 오스트리아의 여성이라는 점도 한몫을 했을 테고 결혼 후 8년 후 첫 아이인 딸 마리 테레즈를 낳게 됩니다.

마리 테레즈는 유일하게 성년까지 살았고 망명생활을 하다가 72세 나이게 사망하게 됩니다. 

 

루이 16세는 성불구? 그들의 자손은 2명 : 이는 거짓 소문으로 루이 16세에 대한 루머는 오랜 기간 아이를 낳지 못해 생기는데 이 기간 동안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거짓 소문이 돌기도 합니다. 

그들의 자녀는 4명이었습니다. 

 

마리 테레즈 출산 시 귀족들이 구경? : 어처구니없게도 이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마리 테레즈를 출산할 때 왕족과 귀족들이 몰려와 출산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 당시의 관례였다고 하는데 이에 부담을 느낀 그녀는 질식 위기까지 이르렀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루이 16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관례를 깨지 못했고 이후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 출산할 때 참석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처형을 당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 루이 16세는 개혁과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이들 부부는 망명을 시도하는데 실패를 하게 되고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군주로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사치와 쾌락 정치 참여 등의 죄를 묻게 되는데 이는 혁명군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여성이었고 반역자였습니다.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품위를 지키며 담담하게 선고를 받아들이고 1792년 8월 10일 시민봉기로 탕플 탑에 유폐되고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해 반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사형장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왕가의 여인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들 : 단두대에서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았을 때 그녀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라마 매너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만을 결국 내 피만이 남는군, 거두어 가세요. 하지만 나를 오래 고통스럽게 하지는 마시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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